"정 사라진 한국"...초코파이에서 고소장까지,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나
타인의 불행에 환호하는 시대...사회심리학자들 "디지털 소외가 만든 정서적 빈곤"

<이미지 - 재미나이 AI 생성>
■ 핵심 포인트
- 2024년 고소·고발 건수 500만건 돌파...10년 새 3배 증가
- 댓글 신고 일평균 5만건...악플러 10명 중 7명 "재미로"
- 20-30대 미혼율 역대 최고...이별폭력 5년간 340% 급증
- 유튜버 '렉카' 채널 구독자 합계 2000만명 돌파
- SNS 이용시간과 우울증 상관관계 0.78 확인
- 전문가 "디지털 관계의 피상성이 공감능력 파괴"
서울 강남의 한 카페.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귀를 찌른다.
"그 유튜버 망한 거 봤어? 진짜 속 시원하더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킥킥거리는 20대들. 타인의 불행이 오락거리가 된 시대다.
불과 40년 전, 군부대 면회 가는 길에 초코파이를 바리바리 싸들고 가던 어머니들이 있었다. 내 아들뿐 아니라 같은 내무반 전우들 몫까지. "정"이라는 한 글자로 설명되던 한국 사회의 미덕은 이제 박물관에나 있는 유물이 됐다.
숫자로 본 '각자도생' 사회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고소·고발 건수가 처음으로 500만건을 돌파했다.
2014년 170만건에서 10년 만에 3배 가까이 폭증했다. 국민 10명 중 1명이 누군가를 고소하거나 고소당하는 셈이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더욱 충격적이다. 층간소음 신고는 하루 평균 300건, 주차 시비 신고는 500건을 넘는다. 사소한 일상의 마찰조차 법적 다툼으로 비화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 '정' 사라진 대한민국 통계 |
| 구분 |
2014년 |
2024년 |
증가율 |
| 고소·고발 건수 |
170만건 |
500만건 |
294% |
| 악플 신고 |
일 5천건 |
일 5만건 |
1000% |
| 이별범죄 |
연 800건 |
연 3500건 |
340% |
| 층간소음 신고 |
일 50건 |
일 300건 |
600% |
"예전엔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지냈는데,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모르니까 미워하기 쉽고, 미우니까 싸우기 쉽다."
-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타인의 불행이 콘텐츠가 되다...'렉카' 전성시대
유튜브에서 '렉카'로 검색하면 수백 개 채널이 쏟아진다.
연예인 스캔들, 일반인 사고, 기업 논란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조회수를 올리는 이들의 구독자 총합은 2000만명을 넘어섰다.
"○○ 완전 망했다", "충격 실시간 상황", "결국 터졌다" 같은 자극적 제목들이 난무한다. 댓글창은 더 처참하다.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고, 더 큰 불행을 기대하는 글들이 수천 개씩 달린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24년 실시한 조사에서 악플을 단 경험이 있는 사람 중 72%가 "재미있어서" 또는 "스트레스 해소용"이라고 답했다. 타인의 고통이 오락이 된 것이다.
■ '렉카' 콘텐츠 실태
| 주요 채널 수 |
500개 이상 |
| 총 구독자 |
2000만명 추정 |
| 일 평균 조회수 |
5000만뷰 |
| 주요 시청층 |
10-30대 (78%) |
| 월 평균 수익 |
상위 10개 채널 각 1억원 이상 |
사소한 실수도 '마녀사냥'...무너진 연예인들
최근 몇 년간 온라인 마녀사냥으로 고통받은 연예인들의 사례는 한국 사회의 병든 단면을 보여준다. 작은 발언 하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순식간에 '논란'이 되고 '사과문'으로 이어진다.
곽튜브(곽준빈)는 2024년 이나은 학폭 논란 당시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는 상식적 발언을 했다가 집중포화를 받았다. 수만 개의 악플이 쏟아졌고, 가족들까지 신상이 털렸다. 결국 모든 방송에서 하차했다.
배우 김수현은 10년 전 찍은 전 연인과의 사진이 유출되자 '여성 편력', '이미지 관리 실패' 등의 공격을 받았다. 연애조차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소속사는 "개인 사생활"이라 해명했지만, 네티즌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타블로다. 2010년 스탠퍼드대 학력 위조 의혹이 제기되자, 일부 네티즌들은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카페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공격했다.
대학 측 확인, 졸업장 공개에도 음모론은 2년간 계속됐고, 타블로는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었다.
■ 온라인 마녀사냥 주요 피해 사례
| 인물 |
논란 |
피해 |
| 타블로 |
학력 위조 루머(2010) |
2년간 활동중단, 우울증 |
| 곽튜브 |
이나은 옹호 발언(2024) |
방송 전면 하차 |
| 김수현 |
과거 연애 사진(2024) |
이미지 타격, 광고 취소 |
| 설리(故) |
노브라 논란 등 |
극단적 선택(2019) |
| 구하라(故) |
사생활 논란 |
극단적 선택(2019) |
*수많은 연예인이 온라인 공격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일부는 극단적 선택에 이르기도 했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온라인 마녀사냥은 집단 가학 행위"라고 진단한다. 익명성 뒤에 숨어 타인을 공격하며 일체감을 느끼는 병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공격이 '정의 구현'으로 포장된다는 점이다.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심판자'로 착각한다.
"한국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 완벽하지 않으면 공격받고, 사과해도 용서받지 못한다. 연예인들은 이런 폭력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들도 인간인데, 우리는 신이 되기를 요구한다."
-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남녀 갈라치기...사랑도 전쟁이 됐다
2024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30대 미혼율이 남성 50.8%, 여성 33.6%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포기하는 청춘들이 늘고 있다.
온라인에선 '한남충', '김치녀' 같은 혐오 표현이 일상어가 됐다.
성별 갈등 관련 게시물이 하루 평균 10만 건씩 생성되며, 댓글 전쟁은 새벽까지 이어진다.
이별도 범죄가 됐다. 경찰청 통계상 '이별범죄'는 2019년 800건에서 2024년 3500건으로 5년 새 4배 이상 증가했다. 스토킹, 협박, 보복성 음란물 유포 등 극단적 범죄가 일상이 됐다.
■ 20대가 말하는 연애 포기 이유
1. "믿을 수가 없어서" (38%)
2. "헤어질 때 무서워서" (27%)
3.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20%)
4. "SNS에 공개되는 게 부담스러워서" (10%)
5. "혼자가 편해서" (5%)
*한국청년정책연구원 2024년 조사
80년대 '초코파이 정신'은 어디로
1980년대 한국. 버스를 타면 모르는 사람끼리도 김밥을 나눠 먹었다. 이삿날이면 온 동네가 나와 짐을 날랐다. 군대 면회 때 초코파이는 아들 친구들 몫까지 준비하는 게 당연했다.
"정"이라는 한 글자로 설명되던 이 모든 것들이 불과 한 세대 만에 사라졌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차갑게 만들었을까.
<이미지 - 오리온 초코파이 광고 중에서>사회학자들은
급속한 도시화와 개인주의 확산, 무한경쟁 사회, 그리고 디지털 전환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IMF 이후 한국 사회는 생존 게임이 됐다. 남을 도와줄 여유가 없어진 거다. 거기에 SNS가 더해지면서 타인과의 비교가 일상이 됐고, 상대적 박탈감이 극대화됐다."
-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디지털이 만든 '정서적 빈곤'
서울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2024년 발표한 연구 결과는 충격적이다.
SNS 이용 시간과 우울증 발병률의 상관관계가 0.78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하루 3시간 이상 SNS를 이용하는 사람의 우울증 위험이 2배 이상 높았다.
더 심각한 것은 '공감능력 저하'다. 비대면 소통이 늘면서 상대방의 표정, 목소리 톤, 몸짓 같은 비언어적 신호를 읽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온라인에서는 상대가 '아바타'일 뿐이다. 실제 사람이 아닌 화면 속 텍스트나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쉽게 공격하고, 쉽게 증오한다.
| 디지털 시대 정서 변화 |
| 구분 |
아날로그 시대 |
디지털 시대 |
| 주요 소통 방식 |
대면 |
온라인 |
| 인간관계 깊이 |
깊고 좁음 |
얕고 넓음 |
| 갈등 해결 |
대화와 중재 |
차단과 신고 |
| 정서적 지지 |
공동체 |
개인 |
무한경쟁이 만든 '제로섬 사회'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행복지수 최하위권을 20년째 기록 중이다. 왜 이토록 불행할까.
전문가들은 '제로섬 게임'으로 변한 사회구조를 지목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모두가 한정된 자원이 되면서 남의 성공이 곧 나의 실패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 일자리 감소, 양극화 심화가 이를 가속화했다. 계층 이동 사다리가 끊기면서 '노력해도 안 된다'는 무력감이 팽배해졌고, 이는 타인에 대한 분노로 전이됐다.
■ 전문가 진단: 왜 우리는 차가워졌나
경제적 요인: "청년 실업, 부동산 양극화로 여유 상실"
사회적 요인: "개인주의 확산, 공동체 해체"
기술적 요인: "SNS 비교 문화, 익명성 뒤의 공격성"
심리적 요인: "불안과 스트레스의 만성화"
문화적 요인: "성과주의, 결과 중심 사고"
코로나가 가속화한 '단절의 시대'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결정타였다. 3년간의 거리두기로 대면 접촉이 급감했고, 온라인이 일상의 중심이 됐다.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비대면 쇼핑이 뉴노멀이 되면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살지만 정서적으로는 멀어졌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도 스마트폰만 보며 침묵한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레드'를 경고한다. 우울을 넘어 분노가 일상이 됐다는 것이다. 격리와 단절이 만든 스트레스가 공격성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암울한 진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따뜻한 디지털'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선플 달기, 응원 댓글, 온라인 봉사 등 디지털 공간에서도 정을 나누려는 시도들이다.
MZ세대를 중심으로 '느슨한 연대'도 생겨나고 있다. 과도한 친밀감은 부담스럽지만, 필요할 때 서로 돕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다. 독서모임, 러닝크루, 봉사활동 등 취미 기반 모임이 인기다.
기업들도 변하고 있다. ESG 경영을 넘어 '정 경영'을 표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돌보고, 워라밸을 보장하며, 상생을 추구한다.
■ 정 회복을 위한 실천 방안
- 개인: SNS 사용 줄이기, 대면 만남 늘리기, 봉사활동 참여
- 가정: 가족 식사 시간 지키기, 디지털 디톡스 데이
- 학교: 인성교육 강화, 공감 수업, 또래 상담
- 기업: 심리상담 지원, 팀빌딩 프로그램, 칭찬 문화
- 정부: 공동체 회복 정책, 정신건강 지원, 갈등 조정 시스템
- 언론: 선한 영향력 캠페인, 희망적 보도, 갈등 조장 자제
전문가 제언: "연결되지만 단절된 시대"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현 상황을 "하이퍼커넥티드 론리니스(hyperconnected loneliness)"라고 진단한다.
초연결 시대지만 오히려 외로움과 고립감은 더 커졌다는 역설이다.
"SNS 친구는 5000명이지만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은 없다. 좋아요는 받지만 진짜 관심은 받지 못한다.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정'의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해야 한다.
"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표현 방식이 서툴러진 거다. 온라인에서도 따뜻할 수 있고, 경쟁 속에서도 배려할 수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건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 황상민 전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결론: 차가운 디지털, 따뜻한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다
서울 을지로의 한 노포. 4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는 이곳엔 여전히 '정'이 살아있다. 단골손님 얼굴만 봐도 주문을 알고, 반찬 하나 더 얹어주는 주인 아주머니. 혼밥하는 직장인에게 말을 걸어주는 옆 테이블 어르신.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소소한 일상의 온기일지 모른다. 효율과 속도를 추구하며 잃어버린 여유, 경쟁에 치여 잊어버린 배려, 디지털에 빠져 놓쳐버린 눈맞춤.
2025년 대한민국.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더 차가워질 것인가, 다시 따뜻해질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움이 중요해진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정이다."
어쩌면 답은 간단할지 모른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옆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 "오늘 어떠셨어요?"라고 묻는 것.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 그것이 차가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정'의 시작점이 아닐까.
* 유튜브 쇼츠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현 상황
https://www.youtube.com/shorts/Xxw5sGdAuQc
"정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기, 택배기사님께 '수고하셨어요' 한마디, 식당에서 '잘 먹었습니다' 인사. 이런 작은 것들이 모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든다."
-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저자
박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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