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이란 말 만든 대부가 떠났다"...전유성, 76세 일기로 영면
말로 웃긴 개그 시초·개그콘서트 원안자...마지막까지 사비로 후배 키운 '진짜 스승'
■ 핵심 포인트
- 9월 25일 오후 9시 5분 전북대병원에서 폐기흉으로 별세, 향년 76세
- "개그맨"이라는 용어 최초 대중화...한국 희극사의 거목
- 슬랩스틱 시대에 '말로 웃기는' 개그 개척한 선구자
- KBS 개그콘서트 원안자...공개 코미디 형식 도입
- 철가방극장·코미디시장 등 사비로 운영하며 후배 양성
- 조세호·김신영 등 수많은 제자...김신영, 마지막까지 병상 지켜
한국 개그계의 거목이 쓰러졌다.
9월 25일 오후 9시 5분, '개그맨의 대부' 전유성이 전북대학교병원에서 76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폐기흉 증세 악화로 입원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그가 떠난 자리엔 '개그맨'이라는 단어와,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한국 코미디의 역사가 남았다.
"희극인 아닌 개그맨"...한 단어가 바꾼 한국 코미디사
전유성이 한국 개그사에 남긴 첫 번째 족적은 '개그맨'이라는 용어였다.
1970년대까지 희극인, 코미디언으로 불리던 웃음 창작자들에게 '개그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한 사람이 바로 전유성이다.
"희극인이라고 하면 뭔가 구식 같고, 코미디언이라고 하면 외국 것 같잖아. 개그맨이라고 하면 전문성도 있고, 자부심도 생기지 않나?" 생전 그가 남긴 말이다. 단순한 용어 변화가 아니었다. 코미디를 하나의 전문 예술 장르로 인식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1호 개그맨', '개그맨의 조상'으로 불렸다. 실제로 그 이후 한국의 모든 코미디언들이 스스로를 '개그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전유성 선배님이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만들어주셔서 우리가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었습니다. 희극인도 아니고, 딴따라도 아닌, 당당한 개그맨으로 살 수 있게 해주셨죠."
- 이홍렬 (후배 개그맨)
몸 대신 말로 웃긴다...슬랩스틱 시대의 혁명가
1960~70년대 한국 코미디는 슬랩스틱이 주류였다. 때리고 맞고, 넘어지고 구르는 몸개그가 대세였던 시절, 전유성은 달랐다.
그는 '말'로 웃기는 개그의 시초였다. 재치 있는 언변과 시대를 꿰뚫는 풍자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1969년 TBC '쑈쑈쑈'로 데뷔한 그는 방송 작가 출신답게 탄탄한 구성과 날카로운 풍자를 무기로 삼았다. KBS '유머 1번지', MBC '청춘행진곡' 등에서 선보인 그의 개그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 사회 비판의 도구였다.
"얘는 무슨 말을 못하게 해!"라는 유행어는 당시 언론 통제를 풍자한 것이었고, 관객들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읽으며 통쾌해했다. 웃음 속에 독을 숨긴, 진짜 풍자의 대가였다.
| 전유성이 개척한 한국 코미디의 변화 |
| 구분 |
Before (1960년대) |
After (전유성 이후) |
| 호칭 |
희극인, 코미디언 |
개그맨 |
| 개그 스타일 |
슬랩스틱 중심 |
언어 유희, 풍자 |
| 공연 형식 |
방송 스튜디오 |
공개 코미디 (개그콘서트) |
| 후배 양성 |
개인별 도제식 |
극단·학교 시스템 |
개그콘서트의 아버지...공개 코미디 시대를 열다
1999년, KBS에 혁명적인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개그콘서트'였다.
이 프로그램의 원안자가 바로 전유성이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이뤄지던 공개 코미디를 방송으로 끌어온 것이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개그, 그게 진짜 개그지. 스튜디오에서 카메라만 보고 하는 건 반쪽짜리야." 그의 철학이었다. 개그콘서트는 이후 20년 넘게 장수하며 수많은 스타 개그맨을 배출했다.
무대 세트 최소화, 관객 참여, 짧은 코너 구성, 신인 기용...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전유성의 아이디어였다. 한국 코미디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프로그램의 설계자였던 셈이다.
■ 전유성이 발굴·양성한 스타들
| 직접 제자 |
조세호, 김신영, 김대범, 안상태 |
| 코미디시장 출신 |
황현희, 박휘순, 신봉선, 김민경 |
| 발굴한 스타 |
이문세, 주병진, 김현식, 팽현숙 |
| 멘토링 |
최양락, 이홍렬, 서경석 등 |
사비 털어 극장 운영..."후배가 내 재산"
전유성은 말년까지 후배 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전국 최초 개그 전용 극장 '철가방극장'을 세웠고, '코미디시장'이라는 극단을 운영했다. 모두 사비를 털어서였다.
경북 청도, 전북 남원 등 지방을 돌며 소극장을 운영했다. 수익은 늘 적자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후배들이 마음껏 개그할 수 있는 무대만 있으면 돼. 돈은 나중 문제야."
그가 운영한 극장과 극단을 거쳐 간 개그맨만 수백 명. 지금 TV에서 활약하는 개그맨 중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진정한 '개그계의 대부'였던 이유다.
■ "한물 가면 보물 된다"...제자 김신영과의 일화
예원예대 교수 시절, 제자 김신영이 찾아와 울먹였다.
김신영: "교수님, 저 한물 간 것 같아요."
전유성: "축하한다!"
김신영: "네? 왜요?"
전유성: "한물 가고, 두물 가고, 세물 가면 보물이 된다. 너는 보물이 될 거야."
이 조언 후 김신영은 '전국노래자랑' MC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제자가 지킨 스승의 마지막..."교수님, 사랑했습니다"
전유성의 마지막 순간, 곁엔 제자들이 있었다.
특히 김신영은 병상에서 떠나지 않고 물수건을 갈아가며 간호했다. 이경실은 "신영이가 교수님이라 부르며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대견했다"고 전했다.
조세호는 26일 SNS에 "교수님의 후배일 수 있어서, 제자일 수 있어서 행복했다"며 "'세호야 어디니? 노래 한번 불러봐라' 하시던 전화가 생각난다"고 애도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엔 후배 개그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홍렬은 주저앉아 오열했고, 최양락은 "개그계의 아이디어 뱅크가 떠났다"며 눈물을 흘렸다.
희극인장으로...KBS서 노제, 지리산 수목장
전유성의 장례는 희극인장으로 치러진다.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가 주관하는 최고 예우다.
28일 발인 후 그가 평생 활동했던 KBS 일대에서 노제가 열릴 예정이다.
생전 그는 딸에게 "수목장을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말년을 보낸 남원 지리산 자락에 잠들 예정이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그의 마지막 소원이다.
김학래 코미디언협회장은 "한국 개그의 역사 그 자체였던 분"이라며 "후배들이 선배님 뜻을 이어 더 좋은 개그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 전유성 연보
- 1949년 1월 28일 서울 출생
- 1968년 TBC 특채 코미디 작가 데뷔
- 1969년 TBC '쑈쑈쑈' 코미디언 전향
- 1980년대 KBS '유머 1번지' 전성기
- 1999년 KBS '개그콘서트' 원안 제공
- 2000년대 예원예대 교수, 후진 양성
- 2013년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명예위원장
- 2025년 9월 25일 별세 (향년 76세)
결론: 웃음을 업으로, 후배를 재산으로
전유성이 남긴 것은 '개그맨'이라는 단어만이 아니다. 슬랩스틱에서 언어 유희로, 스튜디오에서 공개 무대로, 개인기에서 팀워크로... 한국 코미디의 모든 전환점에 그가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비를 털어 극장을 운영하고, 무명 후배들에게 무대를 내주고, 힘든 제자에게 "보물이 될 거야"라고 격려했던 진짜 스승. 그가 키운 후배들이 이제 한국 개그계를 이끌고 있다.
"개그의 씨앗을 뿌려놓으면 후배들이 꽃을 피운다." 생전 그의 말처럼, 전유성이 뿌린 씨앗은 이미 만개했다. 그리고 그 꽃들은 오늘도 대한민국을 웃기고 있다. 개그맨의 대부는 떠났지만, 그의 웃음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남 웃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데. 그걸 평생 한 사람들이야. 개그맨이라는 이름, 자부심 가져도 돼."
- 故 전유성 (1949-2025)
박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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