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 국민 배우 이순재, 25일 새벽 향년 91세로 별세...한국 방송 역사와 함께한 69년
- 대표작 '사랑이 뭐길래' 시청률 65%, '대발이 아버지'로 국민적 사랑
- 칠순에 '거침없이 하이킥' 시트콤으로 재전성기, '야동 순재' 캐릭터 화제
- 지난해 KBS 연기대상 대상 수상,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 기록
- 빈소 서울아산병원, 발인 27일 오전 6시 20분...업계 애도 물결
한국 방송 역사를 함께 써내려온 '영원한 현역' 배우 이순재가 11월 25일 새벽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유족에 따르면 이순재는 이날 새벽 조용히 눈을 감았으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난해까지 연극, 드라마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 끝에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이후 69년간 한국 연기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드라마, 영화, 연극, 예능을 넘나들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시청률 65% 국민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대발이 아버지
이순재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품은 단연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1992)다. 김수현 작가가 쓴 이 작품은 시청률 65%를 기록하며 한국 드라마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극 중 가부장적이면서도 따뜻한 아버지 '이병호' 역을 맡은 이순재는 "대발아!"라고 아들을 부르는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전 국민의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꼬장꼬장한 가부장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정을 담아낸 이순재의 연기는 당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 작품으로 이순재는 '국민 아버지'라는 수식어를 얻었고, 이후 '목욕탕집 남자들'(1995~1996) 등 주말 드라마를 통해 국민적 사랑을 공고히 했다.
| 시대 |
대표작 |
특징 |
| 1960~80년대 |
나도 인간이 되련다,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
한국 방송 태동기 함께한 원로 |
| 1990년대 |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허준 |
국민 아버지 이미지 확립 |
| 2000년대 |
상도, 이산, 거침없이 하이킥 |
칠순 코믹 연기 도전 |
| 2010년대 |
꽃보다 할배, 리어왕 |
예능·연극 넘나들며 전성기 |
| 2020년대 |
개소리,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
구순까지 현역 활동 |
칠순에 시트콤 도전..."야동 순재" 캐릭터로 재전성기
이미 연기의 경지에 올랐지만, 이순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특히 70대에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는 근엄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파격적인 코믹 연기를 선보였다.
'야동 순재'라는 다소 민망할 수 있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이순재는 오히려 "연기에 대한 칭찬 아니겠느냐"며 자랑스러워했다. 이 캐릭터는 어린이 팬들까지 만들어내며 70대 배우의 파격적인 변신으로 화제를 모았다.
2013년 tvN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왕성한 추진력으로 '직진 순재'라는 새 별명을 얻었다. 80대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빠른 걸음으로 동료 배우들을 이끌며 나이를 잊은 열정을 보여줬다.
사극 전성시대 이끈 '묵직한 카리스마'
이순재는 사극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배우였다. 1970~80년대 '사모곡', '인목대비', '상노', '풍운', '독립문' 등에 꾸준히 출연하며 사극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특히 MBC 드라마 '허준'(1999)에서는 주인공의 강직한 스승 유의태 역을 맡아 시청률 64.8%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사극 최고 시청률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후 '상도'(2001), '이산'(2007) 등에서도 묵직한 카리스마와 내공 있는 연기로 작품에 깊이를 더했다.
한 달에 30편 넘는 작품 출연...방대한 필모그래피
이순재의 주요 출연 드라마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엄마가 뿔났다' 등 140편에 달한다.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한창 활동할 때는 한 달에 3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구순까지 무대 지킨 '진짜 배우'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이순재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연기 인생의 출발점이었던 연극 무대로 돌아온 그는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에서 열연을 펼쳤다.
특히 2021년 연극 '리어왕'에서는 200분 공연의 방대한 대사량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87세의 나이에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무대에 올린 것 자체가 화제였다.
2023년에는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연출하며 연출가로서도 첫발을 내디뎠다. 배우를 넘어 연출까지 도전하는 모습에 연극계는 경이로움을 표했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 대상...역대 최고령 수상자
지난해에도 이순재의 연기 열정은 식지 않았다. 10월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 전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에 출연하며 마지막 연기 혼을 불태웠다. 2025년 1월 방송된 '2024 KBS 연기대상'에서는 '개소리'로 대상을 수상해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로 기록됐다. 이날 무대에 오른 이순재는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날도 있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배우 넘어 정치인, 교육자로도 활약
이순재는 한평생을 연기에 바쳤지만, 잠시 정치권에 몸을 담기도 했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국회의원으로서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70~80년대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을 세 차례 역임했으며,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연기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 구분 |
내용 |
| 생년월일 |
1934년 11월 16일 (호적상 1935년 10월 10일) |
| 출생지 |
함경북도 회령 |
| 학력 |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
| 데뷔 |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 |
| 주요 경력 |
TBC 1기 전속 배우, 제14대 국회의원, 가천대 석좌교수 |
| 주요 수상 |
KBS·MBC·SBS 연기대상, 백상예술대상, 보관문화훈장 |
연예계 애도 물결..."큰 별이 졌다"
이순재의 별세 소식에 연예계는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동료 배우 박근형은 지난 8월 "이순재 선생님을 여러 번 찾아뵈려 했는데 꺼리셔서 가뵙지 못했다.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며 건강을 걱정한 바 있다.
후배 정동환은 지난 10월 '2025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이순재 선생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다. 건강이 회복되시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오후 2시부터 조문이 가능하다. 발인은 27일 오전 6시 20분이며, 장지는 이천 에덴낙원이다.
"연기는 평생 해도 모자라"...연기 철학
이순재는 생전 삶과 연기에 대한 철학을 담은 말들로 많은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그는 "나이 들었다고 주저앉아 어른 행세를 하거나 대우만 받으려 한다면 이미 늙은 것"이라며 "나는 '한다'고 마음먹으면 지금도 할 수 있다. 인생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말했다.
연기에 대한 태도는 더욱 엄격했다. "연기를 쉽게 생각했던 배우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던 수많은 배우들이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사라졌다"며 "배우는 늘 새로운 작업에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4년 5월 '제6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펼친 '예술이란 무엇인가?' 특별 무대는 연예계 후배들과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긴 최고의 무대로 꼽힌다. 이 무대에서 이순재는 "평생을 했는데도 아직도 안 되고 모자라는 데가 있다. 연기는 잘할 순 있어도 완성은 없다"며 연기 철학을 들려줬다.
영화 '햄릿'이 인생을 바꾸다
이순재가 연기에 눈을 뜬 건 대학 시절이다.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당시 대학생들의 값싼 취미인 영화 보기에 빠졌다.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철학도에서 배우로의 전환이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이후 69년간 한 번도 연기를 놓지 않았다.
'꽃보다 할배' 시즌3 당시 그는 "우리 나이쯤 되면 언제 어떻게 될 수 있다는 건 잊어버리고 닥치면 닥치는 대로 한다"며 "당장 나는 내 할 일을 하다 보면 이제 끝내야 할 때가 올 거다. 그러면 그때 끝내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중장년은 물론 고단한 삶에 지친 청춘들에게도 큰 울림을 줬다. 배우로서의 생명력에 대해서는 "몸살에 걸려 누워있더라도 '레디 고' 하면 벌떡 일어나야 한다. 이게 바로 배우의 생명력"이라고 정의했다.
한국 방송 태동기부터 함께한 이순재는 TBC, KBS, MBC를 넘나들며 한국 방송사의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140여 편의 드라마, 수십 편의 영화, 무수한 연극 작품에 출연하며 한평생을 무대 위에서 보냈다.
'대발이 아버지', '야동 순재', '직진 순재', '꽃할배'... 수많은 캐릭터와 별명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이순재.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청자 여러분,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는 69년 연기 인생을 관통하는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한국 연기계의 큰 별이 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과 연기 철학, 그리고 끝없는 도전 정신은 후배 배우들과 대중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깨알소식 박예현 기자 | contact@ggaea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