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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의 역사! 이를 안다면 단순히 성과급은 노조 것이 아니다

05-22

<이미지 : 기사의 이해를 돕고자 A생성>

삼성반도체 52년 — 50만 달러 사재에서 영업이익 300조 원까지, 그 길의 역사
1974년 12월 6일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 사재 50만 달러 한국반도체 인수 / 1983년 2월 8일 도쿄 오쿠라호텔 이병철 도쿄선언 / 107명 무박 2일 64km 행군 / 1983년 11월 미·일 이어 세계 세 번째 64K D램 개발 / 12월 12일 신라호텔 자축연 / 1988년 11월 1일 '제2의 창업' / 1992년 64M D램 세계 최초 / 1993년 메모리 세계 1위 / 그리고 2026년 영업이익 12% 분배의 질문
핵심 포인트
1. 삼성반도체의 출발점은 1974년 12월 6일.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병철 회장의 셋째아들 이건희가 오일쇼크로 파산 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50만 달러의 사재로 인수. 1977년 12월 30일 나머지 50% 추가 인수. 1978년 3월 2일 상호를 '삼성반도체'로 변경. 사내·외 "TV도 못 만드는데 반도체가 가능하겠냐"는 만류와 "기술·자본·시장 없는 한국에 반도체는 어불성설"이라는 '3불가론' 속의 결단

  2. 1983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 —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호텔 창문 밖 눈을 바라보며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할 것이니 이 사실을 공표해 주시오." 이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점이 된 '도쿄선언(2·8 도쿄 구상)'. 이병철의 경영철학 '사업보국(事業報國)'이 가장 극적으로 발현된 순간. 1982년 9월 전담팀 구성, 1983년 1월 '반도체 신사 유람단' 미국 출장에 이은 결정적 결단

  3. 1983년 5월 D램 개발 착수, 9월 경기 기흥공장 기공식. 이병철 회장 지시 "6개월 안에 공장 건설을 완료하라" — 선진국 평균 18개월의 3분의 1 속도. 107명의 64K D램 개발 인력 전원이 무박 2일에 걸쳐 **64km 행군**을 완수하며 정신 무장. "마치 자전거 만드는 철공소에 초음속 항공기를 만들라는 주문"이라는 평가 속의 도전. 309개에 달하는 공정 개발을 거쳐 1983년 11월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 성공. 12월 12일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자축연 — 채문식 국회의장 등 참석

  4.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회장 78세 타계 — 도쿄선언으로부터 4년 9개월 만. 1988년 11월 1일 이건희 회장이 삼성반도체통신을 삼성전자에 흡수시키면서 '제2의 창업' 공식 선언. 1992년 삼성전자 **64M D램 세계 최초 개발** — 미·일을 처음으로 추월. 1993년 도쿄선언 정확히 10년 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64K D램은 2013년 등록문화재로, 64M D램은 2019년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지정 — 국가 차원의 역사적 가치 공식 인정

  5. 그리고 2026년 — 50만 달러 사재로 시작된 사업이 영업이익 약 300조 원의 거대한 사업이 된 시점에, 노조와 사측은 5월 20일 영업이익 약 12% 수준 성과급 잠정합의에 도달. 메모리사업부 인당 최대 6억 원 추산. 시리즈 2편에서 다룬 K-칩스법 6조 원 법인세 감면, 622조 용인 클러스터 정부 인프라 지원, 약 516만 소액주주, 시리즈 3편 협력사 1,754개사·사내하청 3만 5천 명 — 그렇게 일군 영업이익의 분배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 질문이 본격 시작된 시점


1. 1974년 12월 6일 — 셋째아들이 사재 50만 달러를 꺼냈다

한국 반도체 역사의 진짜 출발점은 화려한 도쿄선언이 아니라 그 9년 전의 조용한 인수 계약서다. 1974년 12월 6일, 삼성은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50만 달러에 인수한다. 나머지 50%는 미국 소규모 벤처기업인 ICII(Integrated Circuit Inc)가 그대로 보유하기로 했다. 한국반도체는 그해 1월 강기동 박사가 KEMCO와 ICII의 합작 형태로 설립한 회사로, 선진국형 고부가가치 웨이퍼 가공생산을 목표로 했지만 그해 오일쇼크 한가운데서 공장 설립 과정에 파산 직전 상태에 몰렸다. 그 회사를 인수한 사람의 신분이 흥미롭다 —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 삼성그룹 회장이 아니라 호암 이병철 회장의 셋째아들로, 당시 그룹 내 그의 공식 직함은 동양방송 이사였다. 그리고 인수 자금은 회삿돈이 아닌 그의 사재였다.

인수 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강진구 사장이 훗날 회고한 것은 이건희 이사가 받았던 거대한 의심이다. "삼성전자가 명색이 전자 메이커이니만큼 앞으로 반도체사업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때가 이른 것 같습니다." 사내에서는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반도체가 가능하겠냐"는 만류가 끊이지 않았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이 반도체에 도전하는 것을 두고 "기술도, 자본도, 시장도 없는 한국에 반도체는 어불성설"이라는 이른바 '3불가론'을 펼쳤다. 한 개발팀원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 "마치 자전거를 만드는 철공소에 초음속 항공기를 만들라는 주문처럼 무모한 일이었다."

이건희 이사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1973년 오일 쇼크에 충격을 받은 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 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공장 설립 과정에서 파산에 직면했다." 1977년 12월 30일 한국반도체 잔여 지분 50%를 추가 인수해 100% 자회사로 만들고, 1978년 3월 2일 상호를 '삼성반도체'로 변경했다. 그러나 한국반도체의 기술 수준은 형편없었고, 적자는 계속됐다. 자본잠식 상태까지 갔다. 1980년 삼성전자에 합병됐다가 1982년 10월 한국전자통신(KTC) 인수 후 그해 12월 27일 사명을 '삼성반도체통신'으로 변경하면서 — 이병철의 결단을 받아들일 조직적 토대가 비로소 갖춰졌다.

사재 50만 달러부터 삼성반도체통신까지 — 1974~1982 8년
시점 사건과 결정
1974년 1월 강기동 박사, KEMCO와 ICII 합작으로 한국반도체 설립 — 그해 오일쇼크로 파산 직전
1974년 12월 6일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가 사재 50만 달러로 한국반도체 지분 50% 인수
1977년 12월 30일 한국반도체 잔여 지분 50% 추가 인수 — 100% 자회사화
1978년 3월 2일 상호를 '삼성반도체'로 변경
1980년 삼성전자에 합병 — 다만 자체 설계 역량 부족으로 부도 위기 지속
1982년 10월 국영기업 한국전자통신(KTC) 인수 — 통신사업 역량 강화
1982년 12월 27일 KTC 사명을 '삼성반도체통신'으로 변경 — 도쿄선언을 받아들일 조직적 토대 완성


2. 1983년 2월 8일 도쿄 오쿠라호텔 — 호암의 결단

1983년 2월 8일 아침,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 호텔 창문 밖으로 하얗게 쌓인 눈을 뒤로한 채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상대는 한국 서울의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이었다. 호암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할 것이니 이 사실을 공표해 주시오." 한국 반도체 역사에 '2·8 도쿄 구상' 또는 '도쿄선언'으로 기록될 순간이었다. 셋째아들이 사재로 시작한 사업이 9년 만에 그룹 차원의 핵심 사업으로 격상되는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도쿄선언은 즉흥적 결단이 아니었다. 1982년 9월 삼성은 전담팀을 구성해 과거 사업을 평가하고 새 사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시장 전망, 기술 발전 추이, 기업 수준을 본격 검토한 뒤 1983년 1월 미국 출장 팀을 꾸렸다. '반도체 신사 유람단'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팀은 미국 대학·연구소를 조사하며 최신 정보를 수집하고 구체적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다. 출장팀이 올린 보고서는 명료했다 — "향후 5년간 시설투자 4,400억 원, 연구개발비 1,000억 원을 투입해 첨단 기억소자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연간 1억 개 이상 생산할 수 있다." 호암은 보고서 중 '반도체 메모리 분야는 일본이 미국보다 앞선다'는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일본이 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도쿄선언의 직접적 동력이 됐다.

이병철 회장이 도쿄선언으로 밀어붙인 동력의 본질은 그의 경영철학 '사업보국(事業報國)'이었다. 자원이 거의 없는 한국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고, 부가가치가 높으며,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을 키워 — 산업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신념이다. 1983년 3월 15일 삼성그룹이 내놓은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발표문에 이 정신이 그대로 담겼다. 1984~1988년 5년 동안 계획된 투자액은 매년 1천억 원 내외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천문학적 규모였다. 여론은 조롱 일색이었다 — "3년 안에 실패할 것이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초고밀도집적회로(VLSI)는커녕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LSI)도 겨우 만들던 시기였다.

3. 6개월의 기적과 64km 무박 2일 행군 — 1983년 11월의 영광

도쿄선언 다음의 일정은 시분초 단위였다. 삼성은 즉시 D램 개발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D램은 수요가 가장 많고 표준화된 제품이지만, 이미 미국과 일본에 9개의 경쟁사가 있었고 그 가운데 4개사는 이미 256K D램을 개발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삼성은 "D램을 하지 않는 것은 싸워 보기도 전에 항복하는 것"이라는 내부 의견을 토대로 1983년 5월부터 64K D램 개발에 착수했다. 동시에 미국 실리콘밸리에 현지법인을 설립해 한국 기흥팀과 미국 새너제이팀이 동시 개발에 들어갔다. 실리콘밸리 인텔 정문 앞에는 캠핑용 차량들이 서 있었다 — 미국 연구원들이 퇴근한 밤 시간에 연구실을 빌려 새벽까지 기술을 익히던 삼성 반도체 연구팀의 숙소였다.

1983년 9월 경기 기흥에서 반도체 공장 기공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이병철 회장은 한 줄의 지시를 내렸다 — "6개월 안에 공장 건설을 완료하라." 선진국에서는 반도체 공장 건설에 평균 18개월이 걸렸다. 약간의 먼지나 진동에도 오류를 일으키는 반도체 장비의 민감성을 생각하면 절대적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호암은 "후발 주자인 삼성이 선진 업체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조기에 공장을 건설하여 시장에 진입해야 한다"는 논리로 그 절반의 시간을 요구했다. 송편건 공장장(후일 삼성석유화학 사장) 이하 건설팀은 불철주야 공사에 매달렸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개발 인력의 행군이다. 64K D램은 반도체 원조 미국과 일본 업체들만 생산하던 시기였고, 시계·TV 등에 들어가는 단순 칩만 만들던 삼성의 기술과 장비로는 누가 봐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어느 누구도 삼성이 64K D램을 개발할 것이라 믿지 않던 시기에 — **107명의 개발 인력 전원이 무박 2일에 걸쳐 64km를 행군**했다. "정신 무장을 위한" 행군이었다. 309개에 달하는 공정 개발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선진 업체 연수 과정에서 후발 주자로서 겪었던 모욕과 차별 속에서도 자력으로 공정 개발을 추진했다. 64km — 64K D램의 '64'에 맞춘 상징적 거리는 그 자체로 한국 반도체 정신의 한 장면이 됐다.

그리고 1983년 11월, 마침내 64K D램 칩 생산에 성공한다.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 한국 최초였다. 손톱만 한 크기의 칩 속에 6만 4천 개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한 15만 개의 소자가 800만 개의 선으로 연결돼 8천 자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었다. 칩 생산 성공 보고를 받은 이병철 회장은 12월 8일 사장단 회의에서 64K D램 개발과 VTR 개발에 공이 큰 이성규 삼성반도체통신 부장 등 69명에게 총 1억 원의 상금을 수여하며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64K D램 개발 자축연'이 열렸다 — 채문식 국회의장과 진의종 부총리 등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뤄진 국가적 행사였다. 신문 1면 5단 광고는 "미국, 일본에 이은 세계 세 번째 64K D램 개발 성공"이라는 문구 아래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기수로서 최첨단 미래산업을 통해 선진조국 창조의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다짐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삼성반도체통신의 64K D램 개발은 우리나라 첨단산업 개발에 중요한 이정표를 만든 쾌거"라고 평가했다. 이듬해 1984년 5월에는 삼성반도체 기흥 1공장이 준공됐다.

1983년 — 도쿄선언부터 64K D램 자축연까지 10개월
시점 사건
1982년 9월 반도체 사업 전담팀 구성 — 시장·기술 전반 검토 착수
1983년 1월 '반도체 신사 유람단' 미국 출장 — 사업계획서 작성
1983년 2월 8일 도쿄 오쿠라호텔 — 이병철 도쿄선언 /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
1983년 5월 64K D램 개발 본격 착수 — 미·일 9개사 경쟁 속의 도전
1983년 (중기) 개발 인력 107명 전원 무박 2일 64km 행군 — 정신 무장
1983년 9월 기흥공장 기공식 — 이병철 "6개월 안 완료" 지시 (선진국 18개월 대비)
1983년 11월 64K D램 칩 생산 성공 — 미·일에 이어 세계 세 번째, 한국 최초
1983년 12월 12일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 — 64K D램 개발 자축연 (채문식 국회의장 등 참석)
1984년 5월 삼성반도체 기흥 1공장 준공


4. 호암 타계와 '제2의 창업' — 1987~1993, 세계 1위까지의 6년

1987년 11월 19일, 호암 이병철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도쿄선언으로부터 정확히 4년 9개월. 1974년 셋째아들이 시작한 사업이 그룹 핵심 사업으로 자리잡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호암은 — 반도체가 세계 1위에 오르는 결말은 보지 못한 채 떠났다. 사업보국의 마지막 숙원이 미완성으로 남은 셈이다. 그러나 호암이 세상을 떠난 다음 단계는 더 빠르고 더 단단했다. 1988년 11월 1일 이건희 회장은 삼성반도체통신을 삼성전자에 흡수시키면서 — '제2의 창업'을 공식 선언한다. 지금 삼성전자 창립기념일이 11월 1일인 이유가 바로 이날 1988년의 선언에서 나온다.

삼성 반도체 사업이 1980년대 후반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일부 경영진은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부친의 사업보국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흔들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256K D램 가격 상승 효과로 시장이 호황기로 진입했고, 삼성은 그간 투입한 기흥 사업장 시설 투자보다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업적을 남겼다. 1990년대에 들어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더욱 빛을 발했다. 신경영 선언으로 알려진 1993년의 결단 —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 이 그 정점이었다.


<이미지 : 기사의 이해를 돕고자 AI생성>
1992년, 삼성전자는 마침내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974년 사재 50만 달러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지 18년 만에, 그리고 1983년 도쿄선언으로부터 9년 만에 — 미국과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도쿄선언 정확히 10년 후인 1993년,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랐다. 호암의 마지막 숙원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그가 떠난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 정부도 그 역사적 가치를 공식 인정했다 — 2013년 64K D램이 등록문화재(국가등록문화재 제563호)로 지정됐고, 2019년에는 64M D램이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등록됐다. 동의보감 초간본·통영측우대 같은 과학기술사 자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적 유산으로 격상된 것이다.

1987~1993 — 호암 타계부터 메모리 세계 1위까지
시점 사건
1987년 11월 19일 호암 이병철 회장 78세 타계 — 도쿄선언 4년 9개월 만
1988년 11월 1일 이건희 회장 '제2의 창업' 선언 — 삼성반도체통신을 삼성전자에 흡수
1990년대 초 256K D램 시장 호황 — 기흥 시설투자 초과 수익 실현
1992년 64M D램 세계 최초 개발 — 미·일 첫 추월
1993년 신경영 선언 /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 도쿄선언 정확히 10년 후
2013년 64K D램 등록문화재 제563호 지정
2019년 64M D램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등록 — 동의보감 초간본 등과 어깨


5. 그리고 2026년 — 50만 달러부터 영업이익 300조 원까지, 분배의 질문

1974년 12월 6일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의 사재 50만 달러로 시작된 사업이 — 2026년에는 영업이익 약 300조 원에 이르는 거대한 사업이 됐다. 52년의 시간이다. 그 사이에 호암 이병철이 도쿄 오쿠라호텔에서 홍진기에게 건 한 통의 전화가 있었고, 107명의 개발 인력이 64km를 걸어 정신을 다지는 무박 2일의 행군이 있었고, 1983년 11월 미·일에 이어 세계 세 번째 64K D램의 영광이 있었고, 1987년 호암의 죽음과 1988년 '제2의 창업' 선언이 있었고, 1992년 64M D램 세계 최초와 1993년 메모리 세계 1위의 결실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누적된 결과가 — 2026년 5월 20일 영업이익 약 12% 수준의 잠정 합의안이라는 이름으로 분배 테이블에 올라와 있다.

2026년 5월 20일 경기지방고용노동청에서 서명된 잠정합의안은 OPI(성과인센티브) 1.5%와 DS 부문 특별경영성과급 10.5%를 합산해 영업이익의 약 12% 수준 성과급 재원을 만드는 안이다. 메모리사업부 임직원 한 명당 최대 약 6억 원에 달하는 성과급이 추산된다. 그러나 그 영업이익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 본지 시리즈 2편에서 다뤘듯 그 영업이익에는 정부의 K-칩스법으로 인한 6조 원 규모 법인세 감면과 622조 원 용인 클러스터 인프라 지원, 송전선로 지중화 비용 70% 정부 분담 같은 국민 세금이 누적돼 있다. 시리즈 후속 보도에서 다뤘듯 약 516만 명의 소액주주들은 "주주총회 결의 없이 영업이익 12%를 사전 분배하는 것은 법률상 무효"라며 이재용 회장 자택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시리즈 3편에서 다뤘듯 협력사 1,754개사·사내하청 3만 5천 명은 평균 연봉 5,000만 원에 머물러 메모리 성과급 5억 4천만 원과 정확히 10배의 격차를 안고 있다.

호암이 사업보국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던 정신은 — 산업을 일으켜 나라에 보답한다는 의미였다. 1983년 도쿄선언 한 달 뒤 삼성그룹이 내놓은 발표문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에 그 정신이 가장 명료하게 담겨 있다.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면서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그 정신의 끝에 — 64km를 걸은 개발 인력 107명이 있었고, 6개월 만에 기흥공장을 올린 송편건 공장장과 건설팀이 있었고, 인텔 정문 앞에 캠핑카를 세우고 밤새 연구실을 빌렸던 새너제이팀이 있었다. 그들의 노력이 누적된 영업이익이라는 무대 — 그 무대에서 누가 어떤 룰로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가 2026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숙제로 떠올라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1974년 50만 달러의 사재로 시작된 사업이 2026년 영업이익 300조 원의 거대 사업으로 자란 길에는 — 이건희의 사재, 이병철의 사업보국 정신, 107명 개발 인력의 64km 행군, 송편건 공장장의 6개월 기적, 송전선로 지중화 비용을 부담한 국민 세금, K-칩스법으로 6조 원을 깎아준 국회의 결단, 약 516만 명 소액주주들의 자본, 약 12만 8천 명 임직원의 노동, 1,754개 협력사와 3만 5천 명 사내하청의 받침대가 모두 누적되어 있다. 어느 하나라도 빠졌다면 오늘의 삼성반도체는 없었을 것이다. 그 합산 결과를 분배하는 룰을 만드는 일이 — 어쩌면 1974년 셋째아들의 결단과 1983년 호암의 결단에 못지않은 무게의 결단을 한국 사회에 요구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할 것이니 이 사실을 공표해 주시오."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1983년 2월 8일 도쿄 오쿠라호텔,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건 전화)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면서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 삼성그룹 발표문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 (1983년 3월 15일)
"마치 자전거를 만드는 철공소에 초음속 항공기를 만들라는 주문처럼 무모한 일이었다." — 1983년 64K D램 개발팀원 회고
박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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